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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racrazy

 

 

 

 

“저기, 누나는 학창 시절에 어떤 느낌이었어?”

 

비가 그치고 맑개 갠 어느 여름날, 마오가 난데없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즈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느낌이었냐니, 스스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굉장히 방황했었던 것 같아. 너처럼 하고 싶은 일을 바로 찾진 못했으니까.”

“그래도 추억 같은 건 있을 거 아냐. 3학년 때 일본으로 왔다며? 일본에서 처음 사귄 친구는 어땠어? 같은 반 남자애들은?”

“모르겠어. 기억 안 나.”

 

유즈는 무심하게 대꾸하고는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오가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임머신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겠다. 만화 주인공처럼.”

 

그 말에 유즈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그 정도로 궁금해?”

“당연하지. 나는 학생 시절의 누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잖아. 누나가 청춘을 보낼 땐 옆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었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마오가, 문득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유즈는 웃음을 참으며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었다.

마오가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시간에 공백이 있고, 학창시절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마오와 기적처럼 만나서 미래를 그려나가기 전까지 유즈에겐 스쳐지나갔던 다른 이들도 몇 명 있었다.

그러니 그냥 질투가 난다고 솔직히 말하면 좋을 텐데, 마오는 본인의 어린 마음을 감추고 싶어하는 타입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더.

하고 싶은 질문을 삼키며 대범한 척,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모습이 꼭 강해 보이려고 애쓰는 다람쥐 같았다.

소리 죽여 웃다가, 유즈는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마오는 학창시절의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둘 다 학생이었던 시절에도 만난 적이 있었다.

유즈는 말없이 그날을 그려 보았다. 오래된 사진을 꺼내 보듯, 가방 속에서 아껴두었던 초콜릿을 발견한 듯. 맑개 갠 풍경이 그날과 겹쳐졌고, 물웅덩이에 비치는 햇살이 일렁거리며 추억을 그리기 시작했다.

 

*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한 소녀는 갑작스럽게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와서 새로 다닐 학교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중엔 유메노사키도 끼어 있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개 갠 날, 소녀는 면접을 보러 유메노사키에 방문했다.

처음 보는 유메노사키는 그녀가 가 보았던 어떤 고등학교보다도 크고 시끄러웠다. 한국의 고등학교와는 물론, 인근에 있는 다른 일본 고등학교와도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낯선 분위기에 압도당한 소녀는 유메노사키의 정문 앞에서 서성였다.

그리고 때마침 학생회 비품을 사러 나오던 소년, 이사라 마오의 눈에 수상하게 왔다갔다하는 그 소녀가 잡혔다.

 

 

“너,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딱 봐도 우리 학교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마오는 조금 까칠한 말투로 물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성팬들이 남자 아이돌들을 보러 무단으로 침입하는 일이 유메노사키에는 종종 있었다. 학생회 일을 돕고 있는 마오 입장에서는 교문에 낯선 여학생이 보이면 일단 경계 태세를 갖추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데, 이 여자애는 조금 이상했다.

‘아이돌을 보러 온 팬’이라고 하기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다른 여학생들과 달리, 도무지 생각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옷차림도 면접을 보러 가는 것처럼 단정했다. 마오의 시선이 잠시간 소녀에게 머무르는 동안, 높게 올려 묶은 길고 굴곡진 머리칼이 바람결을 타고 넘실거렸다.

아무래도 극성 팬은 아닌 것 같아, 마오는 까칠함을 살짝 덜어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S1 기간이 아니라서 외부인은 허가 없이 출입할 수 없어. 여기서 기다려 봤자 드림페스를 구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막상 듣고만 있던 소녀 입장에선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S1? 드림페스? 처음 듣는 단어의 연속이었다. 유메노사키에 입학하려면 설마 저런 단어까지 알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최소한 자신을 아이돌을 보러 온 사람으로 오해했다는 건 알 수 있어서, 소녀는 침착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저는......그게 아니고요, 이 학교 입학 시험 때문에 면접을 봐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요.”

 

소녀의 말에 마오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입학 시험이라. 하긴 벌써 그런 시기가 되기는 했다. 새삼 자신이 입학 전 면접을 보러 왔던 시절도 떠올랐다.

어쩌면, 이 여자애도 그때의 자신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을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친절하게 대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같은 학교 후배가 될지도 모르니까.

 

“아, 그런 거구나. 오해해서 미안. 허가 없이 무단으로 들어오려는 외부인이 워낙 많거든.”

 

마오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고서 제의했다.

“난 학생회⋯!는 아니지만, 정 길을 못 찾겠으면 안내해 줄 수도 있어. 면접을 보기로 한 장소가 어디야?”

 

상냥해진 태도에 소녀는 조금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아까는 분명히 성가셔했으면서, 왜 난데없이 도와주겠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무심코 소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특이한 헤어스타일, 채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얼굴. 앳된 이목구비를 보니 틀림없이 1학년 또는 2학년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선배인 것처럼 친근하게 구는 태도가 의아했다.

하지만 그 똑부러지는 말투가 싫지 않아서, 소녀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마오는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좋은 안내자였다. 그는 처음 만난 소녀가 후배가 될 사람이라고 믿고, 유메노사키의 내부를 상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이쪽으로 가면 드림페스가 자주 열리는 강당이 나와. 네가 면접을 보기로 한 회의실은 저쪽 끝으로 가면, 교무실 옆에 있고.”

 

그는 데면데면하게 굴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몹시 세심했다.

소녀는 마오에게서 유메노사키의 내부 구조는 물론, 학생회의 개혁이 일어나고서 어수선해진 상황도 들을 수 있었다. 반쯤은 설명이고 나머지 반쯤은 푸념에 가까웠다.

차분히 설명하던 마오가 문득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면접은 몇 시야? 늦은 거 아니지?”

“오후 3시에요.”

“아, 그럼 아직 시간이 있네. 다행이다.”

“제가 늦을까 봐 걱정되세요?”

“딱히 걱정한 건 아니거든? 착각하지 마. 네가 면접에 늦으면 나 때문에 늦었다고 할지도 모르고, 그럼 괜히 학생회의 이름에도 먹칠을 할 테니까 도와주는 것뿐이야.”

 

까칠한 대꾸에 소녀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얼떨결에 후배 취급을 받았고, 그다지 관심도 없었던 유메노사키의 내부 상황을 줄줄이 듣게 되었으나, 낯선 소년과 동행하는 것은 소녀에게 꽤 즐거운 일이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소년은 은근히 후배 앞에서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했다. 까칠한 태도도 실은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실제로는 두 살이나 연상인 소녀가 보기엔, 막상 그게 제일 어린애 같은 점이었다.

귀여웠다. 꼭 잔뜩 경계를 세운 다람쥐 같았다.

 

“회의실은 저기야. 면접 잘 봐.”

 

마오는 보호자라도 된 듯 소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고, 소녀는 꾸벅 감사 인사를 마치고 먼저 대기실로 들어갔다.

면접장 대기실에는 각양각색의 응시생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말투부터가 일본 토박이었다. 그들은 긴장감을 달래기 위해 친한 사람들끼리 잡담을 나누었다.

모두가 미리 쌓아둔 인연을 과시하는 가운데, 소녀는 홀로 뻣뻣하게 앉아 있었다.

분명 자신도 저 사람들과 같은 입장인데, 어쩐지 홀로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워낙 익숙한 느낌이라 그다지 서럽지는 않았다. 아까 만났던 그 소년이 묘하게 다시 보고 싶어졌다.

문득 다른 응시생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내년에 새로 과가 하나 생긴다는 소문 진짜야?”

“인터넷 기사까지 난 걸 보면 진짜 아닐까? 프로듀스과라고 하던데.”

 

낯선 정보에 막 귀를 기울이려던 찰나, 면접관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122번 학생, 들어오세요.”

 

소녀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면접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았다. 유메노사키 일반과를 지망하는 학생에게 딱 할 법한, 아니 그냥 평범한 고등학교 학생에게도 할 법한 일반적인 질문과 대답이었다.

소녀는 모든 질문에 착실하게 답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대기실에서 들었던 이야기도 다시 듣게 되었다.

“이미 들었겠지만, 우리 학교는 내년에 새롭게 프로듀스과를 창설해서 임시로 소수의 학생을 받을 예정이에요. 학생은 이미 있는 과를 지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시범적으로 운영될 프로듀스과에도 입학할 의향이 있나요?”

그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프로듀스과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적지만, 어떤 과든 본교에 입학하게 된다면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평범하고 원론적인 대답이었다. 면접관들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긍정적인 것 같기도 하고, 부정적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대답보다, ‘한국에서 건너온 학생’이라는 신분이 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그렇게 면접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면접관들은 응시생들에게 무언가를 나눠 주었다.

 

“비밀 유지 서약서입니다. 내부 정보를 유출하지 않기 위한 절차이니, 다들 한 명씩 카메라 앞에서 낭독해주세요.”

 

소녀는 ‘비밀 유지 서약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상 외의 난관이었다. 그냥 서명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니.

하필 서약서는 지나치게 어려운 말로 쓰여 있었다. 읽기 난감한 한자도 끼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한자였다.

결국 소녀는 잘 모르는 한자를 애매한 발음으로 대충 건너뛰고 말았다.

면접관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문득 소녀는 면접 내내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자신은 결국 ‘이방인’이었다. 이 학교의 재학생은 물론, 평범한 일본인 응시생들 사이에조차 끼지 못하는.

이제 막 면접이 끝났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벌써 알 것 같았다.

 

*

 

유메노사키에서 나오는 길, 소녀의 눈에 아까 교문에서 만났던 마오의 모습이 잡혔다.

마오는 또래 친구로 보이는 남학생 둘과 함께 있었다. 말투도 여전히 까칠했다. 그럼에도 소녀는 마오가 어쩐지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친한 친구들과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더 천진난만해 보였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땐 저런 표정이구나.

소녀는 마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끝까지 저 무리에 끼지 못할 자신의 처지가 조금 외로워졌다.

바로 그때, 마오가 소녀를 불렀다.

 

“어이!”

 

격이 없는 부름에 소녀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금방 나왔네, 면접은 잘 봤어?”

 

털털하지만 친절한 말투였다. 은근히 상대방에 대한 걱정도 묻어 있었다. 갑자기 훅 들어온 친근함이 낯설어서, 소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마오를 쳐다보았다.

마오 옆에 있던 안경 쓴 남학생이 물었다.

 

“누구야? 아는 사람?”

“아, 내년에 만날지도 모르는 후배⋯⋯. 일반과겠지만.”

 

역시 나를 후배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소녀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어버렸다. 기분 나쁘진 않고, 좀 이상한 기분이었다. 무시한 게 아니라 챙겨주려고 했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착각을 고쳐 주는 편이 나을까?

잠시 고민하던 소녀는 그냥 마음을 바꿨다. 아까 면접장에서 나오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어차피 이 학교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니, 저 남학생과도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다. 소녀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 사실이 제법 서운해서.

 

“조심히 잘 가.”

 

마오의 인사에 소녀는 그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소년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떴고, 소녀는 희한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처음 보는 남학생이 이상하게 거리감 없이 굴었다. 당연하다는 듯 연하 취급을 받았고, 막상 열심히 준비했던 면접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망쳤다.

그런데도, 묘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소녀는 그 이유를 궁금해하면서 걸어가다가 문득 깨달았다.

마오가 낯선 ‘이방인’을 받아주었다는 걸.

그녀는 무리에 끼지 못해 외로웠다. 하지만 이곳의 무리에 맞춰 자신을 뜯어고치고 싶지는 않았다. ‘이방인’으로서, 자기 자신으로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그걸 깨달은 소녀의 마음이 묘하게 풀어졌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마오의 질문에 유즈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새삼 그 기억을 떠올리니 신기했다. 그 하고많은 학생들 중에, 어떻게 너와 내가 딱 마주쳤을까? 그렇게 헤어진 뒤로 우리는 또 어떻게 다시 만나 인연이 된 걸까?

곱씹어 보면 볼수록 운명 같았다. 그리고 유즈에겐, 그 운명이 시작된 날이 무척이나 소중했다. 방을 청소하다가 잊었던 보물을 다시금 찾아낸 기분이었다.

유즈가 아무 대답 없이, 싱글싱글 웃기만 하자, 마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뭐야, 왜 갑자기 웃고 그래?”

“그런 게 있어.”

“그렇게 얘기하면 더 궁금해지잖아. 얘기해 줘.”

“비밀.”

 

마오의 표정이 불만스러워졌다. 유즈는 키득거리며 마오의 볼을 쿡 찔렀다.

 

“뭘 그렇게 긴장해? 찔리는 거라도 있나 봐?”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손사래를 치는 마오의 귓가가 빨개졌다. 유즈는 쿡쿡 웃으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날을 기억하는 걸 알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끄러워할 것 같다. 그 시기의 가시 돋친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함께 곱씹어 본다면, 그날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날이었는지도 이해하겠지.

따라서 유즈는 이 추억을 혼자 간직해 두기로 했다.

언젠가 네가 힘들어하는 날. 내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릴까 불안해하는 날, 그때 꺼내 주도록 하자, 너와의 만남이 나에게 얼마나 큰 기적이었는지 전해 주도록 하자.

그때까지는, 상자 속에 사탕을 소중히 숨겨 두도록 하자.

유즈는 눈을 감았다. 선선해진 바람이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글 커미션 제공 ⓒ윤마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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